이번 여행 중 또 나를 기쁘게 했던 건 좋은 호텔이었다. 우리가 이틀 동안 묵은 이 호텔은 워싱턴주의 주도인 올림피아시에 있는 레드 라이언 호텔이었는데 어찌나 깨끗하고 운치있던지 내 마음에 딱 들었다.

대부분의 호텔들은 접근성을 고려하여 프리웨이나 로컬 도로변에 위치하는게 일반적인데, 이 호텔은 호텔 뒤로 작은 강과 얕은 구릉(언덕배기)을 끼고 있어서 객실에서 바라보는 뷰가 참 좋았던데다 이렇게 제법 괜찮은 수영장도 구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워낙 아침 일찍 출발하고 밤늦게 돌아오는 관계로 창문에서 보이는 아름다운 뷰도 땅거미가 어스름히 깔릴때에만 볼 수 있었고 수영장도 저녁엔 추워서 이용할 수 없었다는게 좀 흠이긴 하다. 이를테면 이 모든게 '그림의 떡'이었다고나 할끼?ㅋㅋ

 

어쨌든 오늘은 워싱턴주에 있는 올림픽 국립공원, 그 중에서도 솔덕 온천(Sol Duc Hot Springs)과 호 열대우림 숲길(Hoh river trail)을 둘러 볼 예정이다.

올림픽 국립공원은 1938년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1981년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는데, 이곳이 바로 올림픽 내셔날 파크 요금징수소이다. 훗날 이 블로그를 보고 이곳을 방문하실 분들을 위하여 친절한 윤요사, 흔들리는 차 안에서도 요금표를 찰칵 찍어주는 센스!!! ^^ 

 

국립공원 안으로 들어갈수록 자연의 모습과 소리, 그리고 향긋한 냄새가 밀려 온다.  

 

드디어 미네럴 온천과 광천수 풀장으로 유명하다는 솔덕 온천에 도착했다.  

 

사실 이런 류의 온천 풍경은 지난 번 옐로스톤에서도 워낙 많이 봐서 그닥 새롭진 않다.

 

이제부터는 하은이와 주은이를 위한 시간이다. 하은이와 주은이는 어딜 가나 온천이나 수영장만 있으면 사족을 못쓴다. 온천을 싫어하는 나는 오늘도 꿋꿋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나대신 울 시엄니가 손녀 둘을 데리고 척척 들어가시니 나는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이번 여행 역시 영문도 모르는채 또 끌려와서(?), 차에서 자라면 자야 하고, 화장실에서 싸라면 싸야 하고, 끼니 때가 되면 싫어하는 음식도 꾸역꾸역 먹어야 하는 하은이와 주은이. 그래도 물에만 들어가면 뭐가 그리 신나는지 엄마가 없어도 저희들끼리 잘도 논다. 이럴때면 아이를 둘 낳기 잘했다는 자부심이 밀려온다. 하긴 이런 자부심은 아주 잠깐이고, 대부분의 시간들은 두 배로 힘들다 ㅋㅋ  

 

게다가 우리 하은이와 주은이, 이번엔 한국에서 온 사촌언니까지 합세했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겠는가? 어쨌든 이날 솔덕 온천은 이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떠나갈 듯 했다는 ㅎㅎ

 

이제는 온천욕을 마치고 트레킹을 하러 갈 차례이다. 앗! 그런데 온천을 할때도 멀쩡했던 날씨가 트레킹을 하려니 갑자기 비가 오기 시작한다. 난감하다. 어느덧 굵은 빗방울이 창문을 때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차창 밖으로 엘크를 볼 수 있는 행운을 얻기도!

워싱턴주의 별명은 '에버그린 스테이트'이다. 그만큼 비가 많이 오기 때문에 숲과 나무가 많다는 뜻이다. 그렇게 비가 많이 오는 지역이기 때문에 워싱턴주를 여행하면서 비를 한 번도 만나지 않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일 게다. 하지만 실내 투어가 아니라 간만에 트레킹을 하려고 하는데 비가 오니 참으로 아쉽긴 하다.

 

그래도 우리는 빗속 트레킹을 각오하고, 미국에서 오직 올림픽 반도에만 있다는 열대 우림(Rain Forest)인, Hoh Rain Forest에 도착했다. 비지터 센터에서부터 트레일길을 따라 걷기 시작하면,마치 원시 그대로를 간직한 듯한 신비로운 초록 숲을 만나게 된단다.  

 

그래서 우리는 비를 피하기 위해 잠시 비지터 센터에 들렀다가

 

그래도 비가 잦아들지 않자 그냥 과감히 내리는 비를 맞으며 트레킹을 강행하기로 결정했다.

아이들은 이 비를 맞으면 감기에 걸릴텐데 어쩌나 하고 걱정했지만, 다행히 하은이와 주은이는 시엄니가 맡아서 van 안에서 놀아 주신다길래, 나는 형님(남편의 누나)과 함께 둘이서 오붓히 트레킹 코스에 나설 수 있었다.

오~~~ 어머니! 감사합니다. 제가 이럴려고 꼭 어머니를 모시고 온 건 아니지만(뜨끔!^^), 어머니 안모시고 왔으면 제가 이 빗속에 아이들을 어디에 맡기고 트레킹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

 

어쨌거나 열대우림의 실체는 대단했다. 축축 늘어진 나무마다 신비로운 이끼들이 가득 덮여 있어 마치 Spooky Forest의 이미지를 연출해 냈다.

 

다음은 내 구린 사진 몇 장.

썅! 우산도 안가져 갔는데 비가 오는 바람에 츄리닝 모자를 뒤집어 쓴 것도 추해 죽겠는데, 오늘따라 왜 하필 꽉 끼는 바지를 입고 나왔단 말이냐! 

하긴 이런 상황이면 살이 쪄서 바지가 꽉 끼는게 아니라, 비가 와서 바지가 달라 붙었다고 핑계를 댈 수 있긴 하다(쯧쯧... 옆에서 남편이 코웃음을 치는구만 ㅋㅋ).

 

결국 우리 일행은 비가 많이 내리는 와중에도 1시간 가량의 트레킹을 완수해 냈다. 사실, 비가 오니 더 좋은 점도 있긴했다. 축축한 삼림에서 뻗어 나오는 묘한 나무 냄새와 자연의 기운이 코 끝을 향긋하게 하고 온몸을 가볍게 만들어 주는 것 같았다.

이제 오늘의 마지막 코스인 '루비 비치(Ruby beach)'로 가보자.

캘리포니아에서 맨날 햇빛 쨍하니 내리쬐이는 반짝거리는 바다만 보다가, 이렇게 비가 오는 음산한 바다를 보니 그리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무들이 해변가에 마구 쓰러진 풍경을 보니 매우 이국적인 느낌이 든다.

 

긴 시간의 차량 이동과 비맞으며 트레킹을 하느라 피곤해 죽겠는데 억지 웃음을 지으려는 나와는 달리, 조카 아이와 하은이는 자연스런 실리 페이스를 연출해 낸다. 이래서 아이들은 마냥 해맑고 그 자체로 즐거운 존재들인가보다.

 

이제 다시 올림피아에 있는 호텔로 돌아갈 시간이다. 벌써 날이 많이 어두워졌다. 다시금 차 안에서 어두워진 창밖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겨 본다. 

온천에서 신나게 놀던 내 아이들의 웃음 소리, 트레킹 코스에서 형님과 단둘이 나눈 즐거운 이야기들, 아이들을 봐주시며 나에게 더 좋은 여행을 만들어주시고자 했던 어머니의 노력, 지금도 얼바인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을 남편의 모습, 그리고 숲속과 바다에서 나를 감싸던 차가운 빗줄기와 시원한 공기들까지...  

어제는 화창한 날씨 속에서 화려한 시내 투어를 누렸다면, 오늘은 빗속에서 오롯히 자연 안으로만 돌아다니며 여행을 즐긴 하루였다. 그래서 나는 오늘, '눈'이 즐거웠다기보다는 '마음'이 훨씬 더 즐거웠다.

가끔은 이렇게 내리는 비를 흠뻑 맞으며(얼바인에서는 충분히 내리는 비를 만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지나온 날들을 조용히 돌아보고, 또 앞으로 다가올 날들을 상상해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일게다. 그래서 나는 오늘, 비록 흔들리는 차 안에서나마 메모지 몇 장을 나만의 생각들로 너끈히 채울 수 있었다.

지난 몇 년. 나는 아이들과 뒤엉켜 지내느라 일기 한 줄 제대로 쓸 여유가 없었는데, 오늘은 이만큼 생각해 보고 또 이만큼 글로 토해냈으니 제법 큰 정신적 호사를 누린 날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Posted by 모델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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